작성일 : 21-01-13 06:41
역알못이 쓰는 역사(3) 굽히는 외교의 성공, 나당 전쟁 편
 글쓴이 : 진주꽃
조회 : 6  
노태돈 저 <삼국통일전쟁사> 참조

unnamed (1).jpg 역알못이 쓰는 역사(3) 굽히는 외교의 성공, 나당 전쟁 편
1. 668년 이후 정세

자꾸 고구려 위주로 언급하게 되는 것 같지만 일단 누가 뭐래도 7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의 가장 큰 사건은 고구려 멸망이었어.

고구려가 멸망함으로서 동아시아에 남은 축은 당, 신라, 일본이 전부가 되었는데 일단 당나라는 고구려라는 큰 혹을 제거해서 축제 분위기였고 신라와 일본은 고구려라는 방파제가 사라진 이상 새로운 스탠스를 취할 필요가 생겼어. 

그 중에서도 신라는 고구려 멸망 이전부터 당과 갈등이 많았거든?
(소정방이 신라군이 늦었다고 장수 하나를 목 베겠다고 한 사건, 그리고 1편에서 언급한 계림도독부 임명 사건 등)

그래서인지 몰라도 신라는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곧바로 태도를 바꿔서 일본과 접촉을 시도해.

668년 9월 일본에 김동암을 사신으로 파견한 게 바로 그때야

668년 9월이면 고구려가 평양성이 함락되던 바로 그 시점인데 이것만 봐도 알겠지만 보통 이걸 나당 전쟁의 시작으로 꼽지는 않아. 왜냐하면 너무 이르고 전쟁과의 연관성도 적은 편이거든.  

하지만 신라와 일본이 앞으로 이어질 전쟁에서 펼칠 외교 전략의 시작점이 되는 지점이니 언급하고 넘어갈게.

방금 말했지만 신라는 당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위해 최소한 일본의 지지, 혹은 방관 정도라도 얻으려고 했을 거야. 

 그리고 그 당시 일본은 한창 당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회합에 참가하는 등 겉으로만 보면 굉장히 대당 외교에 적극적인 것처럼 보였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백강구 전투 패배 이후 백제 망명 귀족들과 함께 열심히 영토 서쪽에 산성을 쌓으며 혹시 모를 당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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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막 즉위했던 덴지 덴노)

그때 도착한 신라 사신 김동암을 맞은 덴지 덴노는 그들을 대단히 환대했어.

신라 상신으로 불린 김유신과 문무왕에게 각각 배 한 척을 선물하고 그 외에도 여러 선물과 함께 왜의 대신 두 명을 사절로 보내게 돼.

이 정도면 굉장히 긍정적인 제스처라고 볼 수 있겠지?

결과적으로 일본 역시 당을 적극적으로 적대하지는 않지만 신라가 반당 정책을 취한다면 우리가 암묵적으로 지지하겠다정도의 의사 표시는 확실히 한 셈이었고, 여기에 힘을 얻은 신라는 재빠르게 행동에 나서기 시작해.  


2. 북진과 백제 점령(670~672)

669년 5월, 신라는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마음대로 차지한 죄'를 빌기 위해 김흠순과 김양도를 사죄사로 보내.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669년 4월 이전에 신라는 백제를 공격했고, 이 공격은 당에 대한 반항 행위로 보일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는 소리야. 

이에 화가 난 당은 두 사람을 옥에 가둬버렸고, 얼마 후에 김흠순을 풀어주며 그에게 웅진도독부의 영토 전부를 반환하라는 황제의 칙령을 들려 보내

하지만 이미 이때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2편 참조)와 연합해 압록강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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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골성 위치)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삼국사기>

670년 3월, 2만여 명의 설오유 중심의 신라-고연무 중심의 고구려 부흥군 연합은 압록강을 넘어 오골성 부근에서 당 휘하 말갈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둬.

하지만 곧 고구려 부흥군 사이의 내분이 일어나고 당나라의 지원군이 합류하자 연합군은 다시 압록강 밑으로 퇴각하게 돼.

자연히 만주 고구려군의 중심이었던 안시성과의 합류는 불발되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평양성-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다시 봉기했기 때문에 당은 이들을 진압해야만 했어

더군다나 원래 안동도호부 도독이었던 설인귀는 670년에는 이미 서쪽에 토번을 정벌하러 떠난 상태라 지휘권의 공백도 존재했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나라는 고간과 이근행에게 4만 명의 병력을 주어 안동도호부 일대를 먼저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안시성은 25년 전과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버티면서 시간을 끌어.

당의 본군이 평양성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면서 신라에게는 정말 천금 같은 시간이 주어지지

이 틈을 타 신라는 671년 6월 사비성 남쪽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친당파 백제인들을 포함해 당군 5천 2백 명을 참수해버려.

이때 당군의 계림도행군총관으로 대비천 전투에서 시원하게 10만 명을 말아 드시고 온 설인귀가 돌아와있었는데, 서쪽 끝에서 돌아오자마자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 사람은 바로 협상 서신을 써서 문무왕에게 보내

여기에 대해 문무왕이 가운데 손가락 올리고 보낸 답서가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 흔히 말하는 답설인귀서야.
(이게 보통은 강수라는 사람이 썼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음)

그리고 672년에는 백제 영토에 소부리주를 설치하는 등 거의 완전히 제압을 끝내게 되지.

#3 신라의 위기(672~673)
671년 7월, 신라가 백제 정벌에 열을 쏟는 동안 안시성이 함락되며 고구려 부흥군의 만주 거점이 사라져. 

더군다나 남쪽의 고구려군은 아까 말한 내분으로 평양에 당군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고 672년 7월에 이 일대를 거의 평정한 고간과 이근행이 평양에 들어오면서 당군은 본격적으로 남하할 준비를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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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대방 = 석문)

이때 황해도 지역에는 기존 고구려 부흥군에 문무왕이 파견한 신라의 지원군이 함께 머무르고 있었어.

위에 맨 밑에 백수성 보이지? 저기서 신라-고구려 군이 승리를 거두는데 그 이후에 자신감이 넘쳤는지 흥분을 했는지 몰라도 갑자기 난잡한 움직임을 보여. 

여러 군영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고 규율 없이 움직이자 당군은 기다렸다는 듯 역습을 가했고 연합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 이게 672년 8월에 있었던 석문 전투야.

흔히 알려진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퇴각한 전투도 바로 이 전투지.

결과적으로 석문 전투 이후 신라는 황해도 이북을 넘을 힘을 잃어버렸어.

그리고 당은 여세를 몰아 673년에는 임진강을 넘으려고 시도하는데 이 근방에 남은 고구려 군도 673년 5월에 임진강 인근에서 당군에게 패전하면서 실질적인 의미의 고구려 부흥군은 이 때 소멸해버려.

다행히 신라는 가까스로 임진강 방어선은 지켰지만 바로 두 달 뒤에 국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유신이 세상을 떠나면서 국가 내부의 혼란도 극에 달해

이때 아탄 대토가 모반을 일으켜서 처형당하고 가족이 노예가 되는 건 기본이고 대당 총관이었던 김진주가 소극적으로 대처해서 처형, 그 아들이자 당 유학생이었던 김풍훈은 아예 당의 길잡이가 돼서 내려오는 등 지배층 내에서도 혼란이 극심했어

#4 신라의 대처(673~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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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쩌겠어. 신라는 바로 무릎을 꿇고 당나라에 또 사죄사를 보내

이번에는 그냥 해명이 아니라 당군 포로를 돌려보내는 건 기본이고 은 3만 3천 5백근, 동 3만 3천분, 금 120분, 그 외에 침, 우황, 승포 같은 물자도 잔뜩 보내면서 용서를 빌어.

천만다행으로 이 시점부터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동방 원정에 부정적인 기류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당은 674년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아

더구나 사령관까지 고간에서 유인궤로 교체되면서 신라는 내부 결속을 다질 시간을 벌 수 있었지

이 기간 동안 신라는 일단 안으로 지방 세력들의 이탈을 막고 산성을 쌓으며, 점령한 백제 땅의 인구와 세금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해

일단 백제 관인들에게 신라 관직을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백제인으로 구성된 백금서당을 편제(672)하기도 했지

그리고 한국사 배울 때 통일신라 파트에 나오는 단어인데 외사정제가 처음 시행된 것도 이 때쯤이야 목적은 물론 지방 세력들의 단속이었고.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석문 전투 직후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 그들의 반응을 확인하려고 했어

이 사신을 본 일본은 배 한 척으로 보답하면서 예전보다는 좀 차갑지만 그래도 아직은 동맹국이라는 걸 확인시켜주었는데, 사실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당이랑 신라 사이를 그냥 방관하고 있는 중이었어

당에서 백강구 전투 당시 사로잡힌 일본 포로들을 돌려주면서 참전을 요구했을 때는 덴노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포로를 받고 물자만 지원해주는 선에서 끝내며 이득을 챙겼고
(이 때 죽은 덴노가 위에 언급한 덴지 덴노) 

이에 신라가 우려하자 비단 50필과 풀솜 1천 근을 보내주는 등 비교적 강한 당을 상대하는 신라를 지원하면서 당이 주는 걸 받아먹는 외교 전략을 취하지 

물론 신라도 일본이 뒤통수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당과 외교 라인을 끊지는 않았어

만약에 일본이 그럴 기미가 보이면 당과 연합해 몽골의 일본 침략 프리퀄을 찍겠다는 위협을 주고 있었으니 일본도 그 스탠스 외에는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거의 없었지 

#5 전쟁 막바지(675~676)

나당전쟁과_보덕국.png 역알못이 쓰는 역사(3) 굽히는 외교의 성공, 나당 전쟁 편

아무튼 674년이 지나고 675년이 되는 동안 신라는 대내외 재정비를 일단 끝마쳤지만 앞선 삼국 통일 전쟁까지 합하면 국력 소모가 너무 심했기에 그래도 여전히 힘겨운 상태였어 

그러던 중 유인궤가 이끄는 당군이 675년 2월에 칠중성을 공격해왔어.

칠중성은 삼국시대 후반기부터 늘 공략 대상이 되었던 샌드백 같은 존재였는데 이번에는 당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려

하지만 유인궤가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 군공을 받는 와중에 당군은 또 다시 지휘관이 공석이 되어 버렸고 이 때문에 당군은 더 남쪽으로 진군하지는 못해.

유인궤의 자리는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 작위를 얻어 대신하지만 당군이 다음 행동에 나서기까지는 거의 7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려

그러던 9월, 이제는 보급 부대 사령관까지 입지가 약화된 설인귀가 천성에서 신라군에게 패해 병선 40척과 말 1천 필을 빼앗기는 대패를 당해

이 천성 전투는 매소성에 머물던 이근행의 당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결국 9월 29일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은 신라에 패배하게 돼

이 패배로 당은 완전히 전쟁 지속 의지를 잃어버리고 바다로 후퇴하게 되는데, 이 당군을 습격해 승리한 전투가 바로 676년 11월에 있었던 기벌포 전투야.

흔히 기벌포 전투의 당측 지휘관은 설인귀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설인귀가 상원 연간(674~676)에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미 이 시점에는 당으로 돌아가 유배된 게 아닐까 싶어

기벌포 전투에서 싸운 설인귀 군은 아마 설인귀가 떠나고 남아있던 그의 부대일 수도 있지

워낙 기록이 애매해서 확실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막간의 여담 정도로만 기억해줬으면 해

#6 그 후

아무튼 이걸로 나당 전쟁의 직접적인 전투는 모두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세 나라의 불편한 외교 관계 뿐이지

일단 신라와 일본, 신라는 전쟁에서 이겼으니 예전처럼 일본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일본은 한창 중앙집권화를 달리고 있는 와중에 신라의 외교 사절(심지어 오랜 전쟁으로 일본에 대한 표현이 점점 깍듯해진)마저 없으면 왕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게 됐지

그래서 신라는 당과 외교를 할 때 꼬박꼬박 챙기는 표문을 일본에는 단 한 번도 가져가지 않았고 일본이 요구해도 무시해버려
(우리가 지금까지 너희를 높게 표현해준 건 전쟁 때문이었으니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지)

한편 당과 일본도 외교 관계가 냉랭하기는 마찬가지여서 702년에 견당사가 파견되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외교 접촉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아

전쟁의 당사국이었던 신라와 당은 교류는 계속했지만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냉각되었어

당은 계속 고구려와 백제의 왕손들을 회맹에 참가시키면서 통일신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

거기에 신라 왕실 중 하나를 유학생으로 데리고 있는 중이었기에 그를 신라군왕으로 두고 다시 전쟁을 벌이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신라 내부에서도 있었다고 해

당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 영토로 인정한 것도 8세기에 들어선 후였기 때문에 거의 30년 간을 양국은 표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지

물론 이 모든 건 발해가 등장하고 나서 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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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걸로 삼국통일전쟁사 내용은 거의 다 살펴봤어

워낙 기록도 적고 내용도 복잡해서 정리하는데 시간도 걸렸고, 글도 난잡하게 써진 게 아닌가 걱정이 좀 되네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내용이 있거나 글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