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 ສາທາລະນະລັດ ປະຊາທິປະໄຕ ປະຊາຊົນລາວ
라오스는 라오ລາວ족의 나라입니다.
라오스Laos라는 명칭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붙게 된 이름으로,
Lao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S가 붙었습니다.
라오족은 중국 남부와 인도차이나 반도에 거주하는 타이Tai 계통 민족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오스라는 호칭은 현재 태국의 타이인과도 민족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관계이며,
중국의 좡壮족과도 민족적 연관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광시좡족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 지역이
타이Tai계 민족들의 유전적인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타이Tai계 민족들은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현재의 베트남 북부,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지역으로 이주하는데,
이후 각자 정착한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뒤 국가를 세우고 활동합니다.
청록색 영역이 15세기의 란쌍 왕국.
역사적으로 알려진 라오스 지역의 첫 왕국은 란쌍ລ້ານຊ້າງ 왕국입니다.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앙코르អង្គរ 지역 기반의 크메르ខ្មែរ 제국이
300여 년에 걸쳐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나,
점차 쇠락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4세기 초 크메르 제국의 휘하에 있던 파 응움ຟ້າງູ່ມ은
현재 루앙 프라방ຫຼວງພະບາງ 지역의 공국에서 망명한 왕족이었습니다.
파 응움은 크메르 제국의 지원을 받아서
루앙 프라방 지역의 공국을 통합했습니다.
그러나 파 응움은 앙코르로 복귀하지 않고,
본인이 확보한 지역을 바탕으로,
1353년 란쌍 왕국으로 독립합니다.
분홍색 영역이 란쌍 왕국.
이후 란쌍 왕국은 내륙국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점차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1637년부터 란쌍 왕국의 황금기를 이어가던 수리냐 봉사ສຸຣິຍະວົງສາ가
1694년에 죽고 후계 구도가 상당히 불안해지자
적통을 놓고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란쌍 왕국은 18세기 초 왕위 계승 분쟁의 결과,
루앙프라방ຫລວງພະບາງ 왕국,
비엔티안ວຽງຈັນ 왕국,
참파사크ຈຳປາສັກ 왕국으로 나뉘게 됩니다.
국가가 3개로 나눠진 만큼 주변 국가들로부터의 간섭 혹은 침략은 심해졌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19세기 초반 톤부리 왕조가 이끄는 시암 왕국의
속국으로 복속되거나 합병되었습니다.
비엔티안 왕국의 왕 아누봉ານຸວົງສ໌은 라오스 저항의 상징이다.
다만 국가가 완전히 멸망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비엔티안 왕국은 적극적으로 시암 왕국에 대항하다가 실패해서 합병되었지만,
루앙프라방 왕국과 참파사크 왕국은
그 정체성은 조금씩 희미해지어질 지언정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883년 초, 통킹에 상륙한 프랑스
그렇게 점점 인도차이나 반도가 시암 왕국의 세력에 들어오나 싶었는데,
1804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응우옌푹아인阮福暎이 베트남을 통일하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고,
19세기 중반 현 베트남 남부 지역과 현 캄보디아 지역은 프랑스에게 넘어갔습니다.
1883년부터 1886년까지 벌인 프랑스와 베트남-청나라 연합의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1887년 10월 17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가 공식적으로 설립됩니다.
메콩 강은 인도차이나의 젖줄인 동시에 중국으로도 뻗어 있는 만큼,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프랑스는 메콩 강이 흐르는 루앙프라방 왕국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시암 왕국은 루앙프라방 왕국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킬 힘도 없었습니다.
1893년 벌어진 프랑스와 시암 왕국 간의 전쟁에서 시암 왕국이 패배했고,
루앙프라방 왕국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산하의 라오스 보호령으로 편입됩니다.
참파사크 왕국 또한 메콩 강 유역을 탐내던 프랑스에 의해 1904년 라오스 보호령으로 편입됩니다.
루앙프라방 왕국은 실권이 주어지지는 않더라도 군주제를 존중받았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참파사크 왕국은 그대로 해체됩니다.
한동안 시암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비엔티안 지역도 다시 라오스 보호령에 편입되었습니다.
5개 지역으로 구성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라오스 보호령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경제적인 핵심은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를 포함한 베트남 지역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내에서는 프랑스 지배자와 베트남 지식인들의 대립 구도가 생겼습니다.
라오스 보호령은 이런 구도에서 비교적 소외된 한편, 프랑스화와 베트남화가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그 예로, 베트남인들의 라오스 이주가 장려된 결과
1943년 기준 비엔티안의 인구 절반 이상이 베트남 출신으로 구성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프랑스와 일본이 공동통치하던 40년대의 인도차이나
라오스 보호령에게 있어 1945년은 일종의 분수령이었습니다.
1945년 2월까지만 해도, 라오스 보호령에게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았습니다.
비시 프랑스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동통치하긴 했지만,
삶의 변화가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지지하던 비시 프랑스가 1944년 8월 실질적으로 무너지자,
필리핀 전선도 무너져 가던 일본 입장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기필코 사수해야 하는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일본군에 제압된 프랑스 군인들
일본은 1945년 3월 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소위 명호작전明号作戦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단독으로 장악하고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를 괴뢰국 형식으로 독립시켜 버립니다.
사인회를 개최한 이 사람은 DJ 히데키가 아니라, 외무대신이자 전권대사 자격으로 온 시게미츠 마모루重光 葵이다.
이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독립했던 괴뢰국들은 다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독립의 맛에 눈을 뜬 사람들은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하고자 마음먹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던 것과는 달리,
라오스에게는 점진적인 독립을 보장했습니다.
라오 왕국은 국기에서부터 알 수 있듯, 루앙프라방 왕국의 정체가 이어진 국가이다.
1949년 기존의 체제를 존중한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었으며,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하고 프랑스가 패하면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인도차이나의 국가들은 완전하게 독립합니다.
라오스 보호령도 라오 왕국으로 온전히 독립하게 됩니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
그러나, 베트남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라오스였던 만큼,
호치민Hồ Chí Minh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의해
라오 왕국에도 공산주의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습니다.
1950년 8월 결성된 파테트 라오ປະເທດລາວ는
라오스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정당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오래도록 남을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 민주 공화국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과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 사이에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라오 왕국도 함께 냉전의 전장으로 변모합니다.
형식적으로는 ‘라오스 내전’이었고, 내전 초기에는 실제로도 내전이었지만,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의 연대와 반공 세력의 연대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중국에서 도입된 59식 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