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10 07:04
명나라 황실에 후궁으로 뽑혀 갔던 조선인 공녀들의 운명.txt (스압주의)
 글쓴이 : 찢쭻찢
조회 : 22  
때로는 중국 내부사정을 중국 기록보다  
조선왕조실록이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할 공녀들과 명황실 내부의 이야기가 그것이죠 

중국 스스로가 기록하기 뭣해서 기록하지 않은 부분을 
사신들과 공녀들을 통해 듣고 조선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 조선왕조 실록을 바탕으로 글을 써 봅니다 




태종8년(1408년) 8월 명에서 사신 황엄이 도착합니다 

명나라 사신 황엄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하죠 


당시 명의 황제는 영락제였는데  
그가 실시한 베트남원정과 베트남의 멸망에 조선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베트남이 다시 독립하자  
세종과 신하들이 잘됐다고 축하하고 명황제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뒤이은 몽골,서역원정과 정화를 파견해 남방항로개척까지 나서고 있던 때였죠 


"저 놈은 지 맘에 안들면 바로 쳐들어올 놈" 
이라는 게 태종과 조선조정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요구를 수락하기로 합니다. 




전국적으로 금혼령을 내리고 13세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규수를 대상으로 한 모집(을 가장한 강제연행)이 있었는데 


처녀들은 미친척하거나 장애인인척하거나  
혹은 금혼령을 어기고 결혼해서 공녀로 가는것을 피하려 합니다. 


이에 부모들은 투옥되거나 관직을 박탈당하기도하고  
큰 벌금을 물어야만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부모들은 보내지 않으려 버텼습니다.


예를들어 권집중의 딸과 함께 양대미녀로 손꼽히던 
권문의(호패법의 발안자)의 딸도 잡혀갈 뻔  
하지만 권문의는 딸이 아프다고 버텼고 그 일로 투옥됩니다 
(만..곧 풀어줍니다..어쨌건 딸은 지켰으니 성공) 



그렇게 두달간 300명의 여성이 모집되어  
몇번에 걸친 심사 끝에 그중 7명이 추려내어집니다 


최종 5명이 정해지는데 최종심사(?)는 태종과 명 사신 황엄이 맡았고 
어쨌건 총 5명이 뽑혀서 명으로 가게 됩니다 



면면을 살펴보자면 


전 공조판서 권집중의 딸 나이는 18세 경상도 안동부 출신. 

전 판서 임천년의 딸 나이는 17세 충청도 회덕현 출신. 

전 영주지사 이문명의 딸 나이는 17세 경기도 인주 출신. 

사직 여귀진의 딸 나이는 16세 풍해도 곡성군 출신. 

수원기관 최득비의 딸 나이는 14세 경기도 수원 출신.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황엄이 떠나자  
가족들은 다들 길가로 나와 통곡했고  
아버지나 오빠,남동생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게 길을 떠난 공녀들은 북경에서 영락제와 마주하게 되는데... 
조선에서도 미녀로 이름높았던 권씨 처녀에게 한눈에 반한 영락제는 
그 자리에서 현인비의 품계를 줍니다.



조선에서 손에 꼽히던 미녀인데다  
옥퉁소를 잘불고 요리에 능하여 영락제의 총애를 받던 현인비 권씨



그렇게 2년이 흘러 1410년이 되었습니다 
영락제의 현인비에 대한 총애는 여전해서 
전쟁터까지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고 
신하들에게 현인비를 위한 시를 지어보라 미션을 내릴정도였죠 



하지만 갑자기 현인비가 급사합니다
(당시 나이 20세) 

전날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죽어버렸죠 
그래서 영락제의 슬픔은 더 깊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흐릅니다 
1413년 영락제에게 여씨 성을 가진 궁인이 참소를 넣습니다 

바로 현인비 권씨는 독살당한 거라는 참소였고  
범인은 조선에서 온 여씨(앞서 5명 중 사직 여귀진의 딸)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사결과 죽기 전날밤 현인비가  
여씨가 가져온 호도차를 마셨다는 게 드러납니다. 


분노한 영락제는 당장 여씨를 잡아오라 명령했고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참혹한 고문끝에 
황제의 총애를 질투하여 독살했다는 자백을 얻습니다 



조선인 여씨는 산채로 온몸의 살을 포 뜨는  
능지처참을 당하여 비참하게 죽습니다
(당시 나이 21세)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 온 다른 공녀들에게도 불똥이 튀어 
임씨(22세)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이씨(22세)는 고문끝에 참형을 당합니다 


5명 중에 살아남은건 마침 남경궁전에 가있었던 
가장 어렸던 최씨(19세)뿐이었습니다 


또한 온 지 얼마안된 2차 공녀(1410년, 1명)에게도 혐의가 가자 
정씨(21세)도 고문에 대한 두려움에 스스로 목을 매어죽습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신하들은 여씨의 가족도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태종은 확실하게 여씨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있는게 아니므로 
가족까지 처벌하는 건 불가하다고 주장하죠 



1417년 

조선에 현인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명은 공녀를 더 요구했고 
그리하여 태종 17년(1417) 5월 
조선에서는 3차 공녀선발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규모를 크게하고 심사를 엄격히 할 것을 요구하여 
무려 600명의 여인을 선발해 뽑고 뽑아서  
2명의 최종합격자(?)를 명으로 보내는데 


지군창군사 한영정의 넷째딸 한씨 처녀와  

부령 황하신의 딸 황씨 처녀였습니다. 


여성의 외모에 대해 기록이 박한 실록에서마저 
한씨는 고고하고 품위있게 아름다우며 
황씨는 대단히 화려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 적었을 정도였죠.




명으로 가던 도중에 황씨처녀는 갑자기 복통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약도 별다른 효험을 보지 못합니다. 

황씨 처녀는 시원한 김치국물이 먹고싶다고 애걸하지만 
중국땅 한가운데서 구할수 있는게 아니어서 꽤나 골치를 썩힙니다.. 

하지만...얼마후 황씨처녀는 복통이 가시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북경에 도착해 둘은 영락제를 만나는데 
영락제는 그들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습니다만... 




황씨가 오는 도중 배가 아팠던건  
사실 임신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낙태약을 먹어서 배가 아팠던 것이고 
오는 도중 아무도 몰래 사산했다는 사실이 이후 조사결과 드러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형부 김덕장의 옆집에 살던 관노였으며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으나 황씨가 공녀로 뽑혀가게 되자 
형부 김덕장에게 부탁하여  
정표로 황씨에게 빗을 건낸 정황도 적발됩니다. 

(이 사건을 드라마 장영실에서 써먹기도 했죠.. 
장영실의 첫사랑 황씨처녀...이렇게...) 



당연히 명 황실은 뒤집어졌죠... 

아니 임산부를 보내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면서 
영락제는 열받아서 조선에 항의하려 합니다 


이 상황은 외교분쟁화 할 수 있는 사안이었고  
황씨 처녀의 목숨이 날라가는건 물론 
황씨 집안이 풍비박산 날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이 소식을 들은 한씨가 영락제에게 찾아갑니다 
(이때 한씨는 "여비"의 품계에 봉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국의 왕이 어찌 사사로이 여염집의 여자 일까지 아시겠습니까? 
부디 그러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황씨에게 너무 무거운 처벌도 하지 말아주시옵소서"라며 
영락제의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호소하죠


평소 총애하던 여비 한씨의 눈물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영락제는  
조선측에 항의하기로 했던 걸 없던일로 하고 
황씨의 처벌을 한씨에게 맡깁니다.


그러자 한씨는 황씨를 그 자리로 불러오게 한뒤  
따귀를 한 대 때리는 걸로 처벌을 대신하죠 




다시 2년이 흘러 1420년이 되었습니다

이해 명 황실의 내명부에서는 대형 스캔들이 터집니다 

바로 앞에 조선인 공녀 여씨를 참소했던 궁인 여씨(한족)와 
궁인 어씨 그리고 환관들이 그룹XX를 즐겼다는게 드러난 것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