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07 14:52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글쓴이 : 진주꽃
조회 : 30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여포(呂布), 자는 봉선(奉先). 병주 오원(五原)군 구원(九原)현 사람이다. 

<삼국지연의>에서 그 무용을 떨쳐 후대에 용맹한 장군의 대명사로 쓰였다. 각종 게임과 컨텐츠에서는 초나라의 항우와 견주어 최강의 무장으로 그려졌다. 

삼탈워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토탈워: 삼국 <연의모드>에서 10레벨 여포는 컨트롤만 잘 하면 혼자 민병대 정도는 1000킬도 넘게 하는 괴수다.)


그러면서도 배신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밖에서는 소극적이지만 집 안에서는 기세가 강하다 하여 '방구석 여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여포는 젊었을 때 부터 용력이 대단하여 여럿 사람들로부터 비장(飛將)이라고 불리었다. 

천자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布射僚丸하며 嵇琴阮嘯라.

(포사료환하며 혜금완소라.)

여포는 활을 잘 쏘았고 웅의료는 공을 잘 놀렸으며,

혜강은 거문고를 잘 타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다.


여포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당대에서 여럿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지만, 천자문이 남북조시대에 편찬된 점을 감안하면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송나라 이전에도 여포는 무예에 있어 시대의 고평가를 받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초선의 미인계에 속아넘어가 동탁을 주살한 것으로 기록 되어있지만,

초선은 삼국지 관직 2편, 여관(女官)에서 다루었듯이, 나관중의 창작 인물이며, 사실은 관직의 이름이다. (나관중 진짜 대단하다.)


4대 미인도.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초선은 가상의 인물임에도 중국의 4대 미녀로 후대에 그려지고 알려졌다.

좌부터 서시, 왕소군, 초선, 양옥환(양귀비)


여포는 <삼국지연의>에서 호뢰관 전투에서 유관장 3형제와 합을 겨룬 것으로 서술했고(사실이 아니지만) 단기로 적진을 휩쓸어버리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여포를 이야기하기 전에 소위 '일기토(一騎討)'와 무쌍(無雙)이라는 말, 그리고 호뢰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1. 부록. 일기토(一騎討)와 무쌍(無雙)


일기토(一騎討)

일본어 잇키우치(一騎討ち)의 한자 표기만을 읽은 단어로 직역하면 '한명의 기마무사 공격' 정도이며 

우리말로는 단기접전(單騎接戰)이라는 말과 대응되지만 사실상 일반적으로는 일기토라는 말이 대중에 더 많이 쓰인다.

 

일본에서는 광범위하게 쓰이는 숙어로 골키퍼와의 1:1상황에서도 종종 사용되는 말이고

한국에는 90년대 많은 젊은이들에게 삼국지를 접하게 해준 KOEI의 게임 삼국지 2가 국내 보급되었을 때 영문이나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읽음으로서 그 표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삼국지 3 공식 한글판이 발매되었을 때, 그 일기토라는 표현을 그대로 공식 번역판에 사용하였고 다음 시리즈들에서는 계속적으로 일기토라는 번역으로 나온다.

삼3일기토.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코삼3의 '일기토' )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일기토라는 말은 속칭 '한본어(일본어의 한국화된 언어)'로서 일기토의 토(討, 칠 토)는 우리말에서 물리적인 싸움을 뜻하기보단 '연구'하거나 '말다툼'하는 뜻으로 쓰인다. (토론, 토의, 검토와 같이)

하지만 워낙 유명해진 단어인 탓에 주몽, 군도:민란의시대 와 같은 한국사 배경 드라마에서조차 사용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후 KOEI와 NEXON의 합작품 (ㅈ망겜)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한국어 표기인 단기접전이라는 말로 표기하여 개선의 의지를 보였는데, 신작(개인적으로는 더 ㅈ망겜)인 삼국지14 에서도 단기접전 이라는 용어를 택한다. 토탈워: 삼국의 경우에도 '일기토'라는 말 보다 '결투'라는 표현으로 이름을 붙였다.


삼탈워 결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사실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려면 결투 안하는게 좋다. AI가 패배하려 하면 아군 장수에게 결투신청을 자주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일대일 결투'를 벌이며 전투의 승패에 영향을 주었는데, 대부분은 죄다 허구다.

비교적 정확한 사료라고 여겨지는 것들에서 일대일 결투라고 해석할 만한 대표적인 것들을 모아보았다.

(직접 베었다. 라는 표현도 추가했다. 포로로 삼은 뒤 참수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 기록이 명확치 않으니 전투 중 결투하다 죽은 것으로 해석해보겠다.)


여포 vs 곽사

여포가 곽사에게 대담하게 1:1 신청을 하고 이에 곽사가 응하자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곽사는 모(矛)에 찔려 쓰러졌고 부하들이 달려나와 구했다고 전한다. (이게 우리가 흔히 아는 '일기토'의 진짜 모습이다.)


관우 vs 안량

관우가 안량의 대장기를 보고는 수많은 적병을 뚫고 들어가 안량을 찔러 죽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고 기록했다.


황충 vs 하후연

황충이 한번의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하고 군대를 대패시켰다 했는데, 이 한번의 싸움을 결투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손책 vs 태사자

손책과 태사자가 서로 만나 개싸움을 벌였는데,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초 vs 염행

어린시절 마초는 염행에게 줜나 뚜드려 맞아 죽을 뻔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덕 vs 곽원

방덕은 이전 마초편에서 서술했던 평양전투에서 곽원의 목을 직접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학맹 vs 조성

학맹이 여포에게 반기를 들자 조성이 이번엔 학맹에게 반기를 들어 결투를 벌인다.

학맹은 조성을 찔렀고, 조성은 학맹의 한쪽 어깨를 찍었다고 기록되었다.


여몽 vs 진취

손권이 황조를 공격하면서 여몽이 진취의 목을 직접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 있겠지만 대략 이쯤이다.


무쌍(無雙)

직역하면 '둘도없다' 라는 뜻이다. 대체로 무(無, 없을 무)를 무(武, 굳셀 무)로 착각하여 무예가 뛰어난 사람으로 알고들 있지만 아니다.

이 무쌍은 '적은 수나 단기로 대군 사이에서 무용을 떨쳤다'는 의미로 오용된다.

재주가 엄청 뛰어나다는 뜻으로, 한나라 명장 한신을 가리키는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에서 둘도없는 사람)이 그 어원이다.

(참고로 변화무쌍 이라는 말도 그 변화가 둘도없이 특이하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무쌍'의 우리말 올바른 표현은 용맹무쌍, 용감무쌍 등이 있겠다.)


예로부터 적은 병력과 장수가 대군을 맞아 회전을 했음에도 패배하지 않고 오히려 승전하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그 원인으로 하나 꼽자면 장수와 정예군의 무장상태를 들어볼 수 있겠다.

옛부터 장수나 그의 친위군들이 사용하는 중갑은 그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고, 일반 병사들이 사용하는 화살은 그 중갑을 뚫기 어려웠다고 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다. 막기 위해서 입는건데 막긴 막아야지)


중장비의 비싼 가격때문에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장수들처럼 무장시키기는 어려웠고, 더구나 삼국이 정립되기 전 난세의 초기에는 병사를 모집함에 있어 삼국 정립 이후보다 조금은 덜 체계적이고, 병사들의 전투 훈련도와 전쟁의 두려움을 억제하고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 아무 거리낌없는 정신 무장('사기'라고 많이 표현한다.)이 낮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물리적 무장이나 정신적 무장이 잘 된 장수나 병사는 상대적으로 체계화가 덜 된 적군들 사이에서 그 무용을 떨칠 수 있었던 것.


항우는 5천 기마병에게 단 수십의 기병을 이끌고 세번이나 돌격해 적장의 목을 베고 깃발을 부러뜨리는 등의 용맹을 보였었고, 관우도 안량의 대군 속을 파고들어 안량의 목을 베어버린 기록 등이 완전히 과장된 사실은 아닐거라는 것이다.


2. 부록. 호뢰관


호뢰관 복원.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호뢰관의 복원 상상도. 출처는 위키)

여포를 떠올리면 '호로관 메뚜기'라는 이미지가 요새 인터넷 상에서 계속 떠돌고 있다.

메뚝.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아마 이렇게 더듬이같은 관을 쓴 모습 때문이겠지. 작성자는 호로관 메뚜기의 정확한 어원은 모른다.)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호뢰관은 주나라 때인 BC 571년에 건축되었고, 주나라 5대 목왕이 이곳에서 호랑이를 가두어 키웠다고 하여 '호랑이 우리 관문'이라는 호뢰관이라고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또는 본래 이름이 사예주를 지킨다는 의미의 사수관에서 당나라에 관문을 성으로 증축하면서 호뢰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사용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에 개박살이 난다.


아무튼 나관중이 서술한 <삼국지연의>에서 사수관에서 화웅이 술이 식기전에 관우에게 죽고, 호뢰관에서 삼형제와 여포가 겨루었다는 내용은 모두 허구다.

정사 기록에 호뢰관이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고, (<여포전><동탁전><손견전><선주(유비)전><무제(조조)기> 등) 애초에 나관중이 사수관과 호뢰관을 혼동하여 다른 관문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때문에 앞으로 서술할 여포에 관해서 호뢰관에 대한 내용은 일절 없다. 너무 낙심하지 말자. 


3. 정원에게서 동탁으로


여포는 효무(驍武, 사납고 용맹함)하여 병주의 정원에게 발탁되어 복무하다가, 병주자사 정원이 기도위가 되어 하내에 주둔하게 되자

여포에게 부곡사마와 주부를 겸하게 하여 매우 친근하게 대우했다. (주부에 임명된 것으로 여포가 현재 우리가 아는 것 처럼 그리 멍청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지연의>처럼 양아버지였다는 기록은 없다.)


후한 영제가 붕어하자 정원은 하진의 부름을 받고 십상시를 죽이기 위해 낙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하진이 패망하고 궁궐 안에서 혼란한 틈을 타 동탁이 낙양으로 들어왔는데, 동탁 입장에서는 정원의 병주세력이 참 껄끄러워 그를 죽여버리고 그의 군대를 얻으려고 했다. (동탁의 서량 세력과 정원의 병주 세력은 이후에도 계속 대립한다.) 


동탁은 여포가 정원에게 신임을 얻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간교하게 여포를 꼬드겨 정원을 죽게 한다. (이숙을 보내 적토마를 주었다 어쨌다 하는 건 없다.)

여포는 정원의 머리를 베어 동탁에게 갔고, 동탁은 여포를 정원이 역임하던 기도위로 삼고 아끼며 서로 부자(父子)지간이 되기로 맹세한다.

(동탁과 여포는 의부자가 맞다고 볼 수 있겠다.)


동탁이 정권을 잡고 헌제로 황제를 바꾸었으며, 영사왕후 하씨(하태후)를 죽이고, 결국엔 폐위된 홍농왕(소제)까지 죽인다.

상국에 올라 전횡을 일삼자, 각국의 제후들은 동탁을 몰아내기 위해 연합하여 동탁을 공격하게 된다.


4. 양인전투


(반동탁연합은 동탁에 대해 다루게 되면 더 자세하게 할 것이므로, 배경이나 결과 이런 것들 보다는 여포와 손견이 대전한 '양인전투'를 기반으로 하겠다.)

<여포전>,<동탁전>,<한서 여포열전>,<한서 동탁열전>,<손견전>이 기반인 서술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만들어져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동탁도 군대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원소와 왕광은 하내에, 한복은 업군에, 공주는 영천에, 원술은 노양에, 조조,유대,장막,교모,포신 등은 산조 일대에 집결해 있었다.


이에 동탁은 서영을 시켜 왕광을 선제공격했고, 왕광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러자 보다못한 조조가 사비를 털어 마련한 군대로 동탁을 공격했지만, 서영에게 다시 패배한다. 더구나 패배한 조조는 제후들의 술판을 보자 빡쳐서 남쪽의 양주 방면으로 떠나버린다. (연의에서는 원소가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고 하나, 당시 원소는 조조와 떨어져 있었다. 더구나 원소는 한복이 군량공급을 끊어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다.)


한편 장사의 손견은 장사성에서 형주 남양군까지 2,800리에 달하는 긴 행군 끝에, 동탁에게 순종하던 남양태수 장자를 죽여버리고 남양을 점령한다. (손견은 형주자사 왕예도 개인적 원한으로 죽인 적이 있어, 이후에 탈이 될까 싶어 원술에게 남양을 넘겨버리게 되는데, 당시 손견은 원술의 후견을 받았다고 해석도 된다.)


동탁은 소식을 듣고 서영에게 명령해 손견을 기습하게 했다. 야밤에 서영이 지휘하는 서량기병에 손견은 조무에게 자신의 두건을 넘겨 어그로를 넘기고 포위망을 뚫었고, 손견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나관중이 서영의 모습에서 화웅을 만든 것이다.)


서영은 손견과 같이 참전한 영천태수 이민(李旻)을 사로잡아 삶아 죽여버린다. 

(동탁은 의병을 포로로 잡으면 천으로 돌돌 말아 땅에 엎어놓고 뜨거운 기름을 거기에 부어 죽였다.)

살아남은 손견은 양인성에 주둔하여 패잔병을 수습하고, 전투준비를 계속하자 동탁은 이번엔 장수 호진(胡軫)을 대독호(大督護, 대도독이라고 이해하자. 서진 시대 무관의 명칭이다.)로 삼고 여포를 기독(騎督, 기병을 감독하는 무관)으로 삼아 그에 대응하게 하였다.


호진은 성정이 급한 사람으로, 출병 시 미리 선언하기를


호진.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지금 이번 출행에서는 응당 한명의 청수(靑綬, 2천석의 관리를 뜻하고 이는 손견을 말한다)를 참수하고, (군대를) 정돈해 돌아갈 뿐이다.” 


라고 말하자 여러 장수들이 그를 미워했다고 한다. 

호진과 여포의 군대는 광성(廣成)에 도착했고, 광성은 양안과 불과 몇십 리 정도의 거리였다. 

동탁은 출병 시 호진에게 광성에서 묵으며 말을 어루만져 먹이고, 밤에 진군하여 손견을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고 그대로 행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호진을 싫어하고 꺼려서 오히려 손견이 작전을 망쳐주기를 바랬다.

이때, 여포가 말한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양인성 성중의 적들이 이미 도주하였다 하니, 응당 추격하여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놓치게 된다."


어디서 나온 첩보인지는 모르겠으나(아마도 호진과 사이가 좋지 않아 망치기 위해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여포의 말을 쫓아 광성에서 즉시 출병해 손견에게 향했지만 양인성의 수비는 이미 철저히 갖추어져 공격할 수 없었고, 동탁의 말대로 하지 않아 병마가 매우 피로해졌다. 어느덧 해가 어두워져 양인성 앞에 진영을 세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갑옷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데 여포가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성중의 적들이 나왔다."

라고 하였다. 동탁의 군사들은 모두 요란하게 달아나 벗어두었던 갑옷과 장비들을 다 버리고 말도 잃었다. 10리를 퇴각하다 적이 나오지 않았음을 알자, 날이 다시 밝아올 쯤 버렸던 병기를 수습하고 재공격을 하려 했으나 양인성의 수비를 뚫어낼 수 없었고 다시 광성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포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기록에 없다. 다만 <동탁열전>에서는 호진과 여포가 불화하여 군중이 뒤숭숭해 사졸이 흩어지고 어지러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병사들을 모두 수습한 손견은 동탁군을 공격하여 화웅을 붙잡아 죽였고, 동탁은 손견에게 패하자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게 된다. 손견이 낙양에 입성했지만, 사실상 반동탁연합군은 와해된 상태였고, 후견 원술의 명을 받아 손견은 형주의 유표를 공격하러 돌아가게 된다.

(원술은 연의와 다르게 손견에게 군량을 매우 잘 조달해주었다. 낙양에서 발견했다는 옥새에 관한 이야기는 손책을 다룰 때 언급하겠다.)


<삼국지연의>에서 처럼 모든 제후들이 한곳에 모여 합심하여 동탁을 공격하고, 동탁은 화웅과 여포를 내세워 그와 대적한 것이 아니다.

제후들의 연합이 명목상 진행되었지만, 연합의 의미와는 달리 자신들만의 이해득실을 계산하고 군사를 움직였으므로 와해는 예정된 것이었다.


5. 동탁을 참살한 여포


동탁은 평소 남들에게 안하무인이었기에, 그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거동할 때 여포에게 하여금 자신을 항상 수행하게 할 정도로 신임했지만, 분노조절장애였던지 화가 나면 여포에게조차 그 후환을 생각하지 않았다.


한번은 여포가 동탁의 뜻을 사소하게 거스르자 동탁이 수극(手戟, 손으로 쥐고 던질 수 있는 작은 극)을 들어 여포에게 던졌다. 여포는 민첩하게 피하고는 안색을 바꾸어 동탁에게 넙적 엎드려 사죄했더니, 동탁의 화는 풀렸다고 한다.

(연의에서 초선과 밀통하다가 발각되어 창을 던졌다는 창작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실제로 여포는 초선은 아니지만 동탁의 시비와 사통하고 있었고, 이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더욱 안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도(司徒) 왕윤은 여포와 같은 병주 출신으로 평소 동탁을 죽일 생각으로 상서복야 사손서와 함께 모의하고 있던 중에 동탁의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왕윤과 여포가 만나자 여포는 동탁이 자신에게 수극을 던진 일을 스스로 말하였다.

왕윤은 이것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겨 여포에게 동탁 암살에 내응하도록 권했다. 이에 여포가 말했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동탁과 저는 부자(父子)사이와 같은데,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그러자 왕윤은 말했다.


왕윤.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그대는 성이 여(呂)이니 본래 골육(骨肉)도 아니오. 지금 죽음을 걱정할 겨를조차 없는데 어찌 부자라 하시오? 극(戟)을 던질 때 어찌 부자간의 정이 있었겠소?"


마침내 여포는 왕윤의 권유를 승낙한다.

헌제가 병에 걸렸다가 막 낫게 되어 미앙전(未央殿)에서 큰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때를 거사일로 삼아 여포는 같은 병주 출신인 이숙과 친병 10여명으로 동탁을 수행하는 척 하며 액문을 지켰다. 왕윤은 사손서에게 거사를 알려주고 조서를 쓰게 한 뒤 여포에게 주었다.

동탁이 도착하자 이숙 등이 동탁을 막아세웠다. 동탁은 매우 놀라 


동탁.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여포야! 어디 있느냐!!"

하자 여포가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역적을 주살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라고 소리쳤고 동탁은 여포에게 욕설을 한다.


동탁.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어리석은 개새끼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

결국 여포는 동탁을 죽이고 장안성 내 그의 삼족을 멸했다. 주부 전경(田景)이 동탁의 시신 앞으로 달려나가니, 여포는 그를 또 죽여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이는 단순히 동탁의 사망이 아닌 낙양 내 양주세력과 병주세력의 대결이었다고 해석하는 자도 있다.


6. 이각, 곽사와의 대결


동탁이 죽자, 왕윤은 여포의 공을 치하하여 분무장군(奮武將軍), 가절로 삼았고, 의례는 삼사(三師)에 비견되도록 하였으며 온후의 작위를 내려 조정을 장악했다. 동탁이 량주(동탁은 량주 농서군 임조현 출신이다, 오의 양주와 구분하기 위해 량주라 했다. 양주라 읽어야 마땅하다. 김정은 개새끼) 출신이기에 량주인들을 두려워하고 꺼려했고, 량주인들 또한 여포와 왕윤에게 큰 원한을 품었다.


때문에 왕윤은 장안 내부의 량주세력을 모두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한 채옹에게 벌을 주려 하였고, 채옹이 사죄하며 한나라 사서(史書)를 계속 쓰게 해달라 애원했지만, 사마천이 <사기>를 씀으로써 한무제를 모독했다는 이유를 들며 채옹을 죽여버린다.


동탁이 죽기 전 그의 사위인 우보는 군사를 거느리고 홍농군 섬현에서 이각, 곽사, 장제 등과 주둔하고 있었는데, 동탁이 죽자 여포는 이숙을 시켜 섬현으로 보내 황명으로 우보를 죽이려 했다. 이에 우보가 역으로 공격하자 이숙은 홍농군성으로 패주했고, 여포는 노하여 이숙을 죽여버렸다.


하지만 우보는 평소 겁이 많았던 사람으로, 군영이 혼란하고 배반하여 도망가는 자가 생기자 놀라 금은보화를 챙겨들고 평소 후대하던 호적아(胡赤兒) 외 5~6명과 함께 섬현성을 나가 북쪽으로 향했다. 호적아 등은 우보의 금은보화를 탐내어 우보의 머리를 잘라 장안으로 보낸다.

(장수 휘하의 호거아가 아니니 오해하지 말길)


이각과 곽사는 우보가 패망하여 의탁할 곳이 없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가후가 그들을 말렸고 무리들을 이끌어 지나는 곳 마다 군사를 거두니 장안에 이르렀을 때에는 군사가 10만여명에 달했다. 동탁의 옛 수하였던 번조, 이몽, 왕방 등도 합류했다.


이에 여포는 성 북문방면에 있던 곽사를 향해 성문을 열고 군사를 이끌어 나아가 말했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군사들을 물리고 다만 (우리끼리) 몸소 싸워 승부를 가름하자!"


곽사와 여포는 더불어 싸웠는데 여포가 모(矛)로 곽사를 찌르자 뒤에 있던 곽사의 기병들이 앞으로 나와 곽사를 구해 돌아갔다. 이에 곽사와 여포는 서로 돌아갔다.


이각과 곽사의 군대는 장안성을 열흘 동안 맹공하였다. 여포는 당해내지 못하고 계속 패배하였다. 

여포는 이각의 군대가 성 내로 들어오자 청쇄문(靑瑣門) 밖에 말을 세워두고 왕윤에게 말했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공도 함께 가시지요."


왕윤이 답했다.


왕윤.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국가를 평안케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니 만약 이를 이루지 못하면 봉신(奉身, 몸을 바침, 직임을 다함)하여 죽을 뿐이오. 조정의 어린 주인이 나를 믿고 의지하는데 화란에 임해 구차하게 위험을 면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할 바가 아니오. 힘써 관동(關東)의 여러 공들에게 말해 국가를 염려하도록 해주시오."


여포는 달아났고, 왕윤은 성에 남아 이각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이각은 이에 그치지 않고 궁궐과 성 안을 약탈했으며, 장안성 내부의 백성 중 울지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한참 뒤 이각과 곽사는 이후 번조를 죽이고 서로 싸우다가 이각의 수하 양봉이 헌제를 데리고 장안을 탈출한다.

헌제를 맞이한 조조는 양봉을 공격하였고, 양봉은 낙양에서 도망쳐 연주와 서주 일대에서 유랑하였다.


7. 떠돌이 여포의 연주입성


반동탁연합군이 봉기했을 때, 동탁은 원씨 일가인 원외와 원기를 살육했는데, 여포는 동탁을 죽임으로써 이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하고 그 덕을 보고자 원술에게 의탁하려 했지만, 원술은 그의 반복(反覆, 언행을 이리저리 고침)함을 꺼려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포는 하내의 장양에게로 갔다.


(<여포전>의 기록인데 <후한서 여포열전>에서는 원술이 여포를 후하게 대접했지만, 여포 군사들의 포악함 때문에 원술이 싫어하였고 여포는 원술을 떠난 것으로 서술했다. 진수의 정사와 후한서 열전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두자.)


장양에게 간 여포는 자신을 현상수배한 이각 때문에 장양에게 붙잡혔다. 이에 여포는 장양에게 위급하게 말한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나는 경(卿)의 주리(州里, 같은 병주출신 이라는 것)이니 경이 나를 죽이더라도 경에게는 (그 공이) 미약할 것이오. 차라리 나를 (산 채로 붙잡아) 팔아넘기느니만 못하니, (그리 한다면) 가히 이각, 곽사에게 지극한 관작과 총애를 얻을 것이오."

이 말에 넘어간 장양은 겉으로는 이각에게 따르는 척 했지만, 여포를 보호해주었다.


장양의 밑에서도 불안했던 여포는 원소에게 가 의탁했는데, 원소는 여포와 함께 기주 상산국에서 흑산적 장연을 공격하였다. 

장연은 당시 상산, 조, 중산, 상당, 하내 등 산맥을 중심으로 기주 북방으로부터 병주를 가로질러 사예주 북부까지 이르는 어마어마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군대의 규모는 정예병은 1만을 웃돌고 기병이 수천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여포는 성렴(成廉), 위월(魏越) 등과 함께 수십 기(騎, 기병)를 이끌고 말을 달려 장연의 진(陣, 진영)에 돌격하여 하루에 3~4번에 이르기까지 맹렬히 싸워 모두 참수하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연달아 10여일을 이렇게 싸워 장연군을 대파하였다.


여포는 적토(赤兔)라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마중적토 인중여포(馬中赤兔 人中呂布, 말 중에는 적토 사람 중에는 여포)라고 칭송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적토마는 여포 사후 관우에게 주어졌고, 관우가 죽자 적토마가 굶어서 따라죽었다고 했는데, 말의 수명은 '현재기준' 평균 25년 정도이고, 여포가 장연을 토벌한 것은 192~194년 사이, 관우가 번성을 공격한 시점이 219년이니 약 25년 이상의 갭이 있다. 판단은 펨붕이들이 알아서.)


여포는 자신이 원씨에게 공이 있다고 자만하며 원소의 제장들 관직은 함부로 사칭한 것이라 하여 무시했고, 여포의 군사들이 주변에서 노략질을 일삼으니 원소는 이를 매우 근심했고 여포의 군벌이 성장함을 경계했다.

여포는 원소의 뜻을 눈치채고 원소에게 낙양으로 떠날 것을 청했다. 원소는 응낙했지만 그가 돌아와 해칠 것을 두려워하여 여포를 죽이려고 했다. 



쟁.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쟁)

다음 날 밤, 여포가 출발하려 할 때 원소는 갑사(甲士) 30인을 보내며 여포를 전송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포는 그들을 군막 밖에 멈추게 하고는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장막 안에서 쟁(箏) 을 연주하게 했다. 군막 밖의 갑사들이 해이해지자 여포는 군막을 몰래 나와 떠났고, 원소의 갑사들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깊은 밤이 되자 갑사들은 여포의 침소에 들어가 여포의 이불을 베고선 여포를 죽인 것으로 여겼다. 

원소가 나중에 주변을 신문(訊問) 하여 여포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성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여포는 다시 장양에게 가서 의탁하려고 하던 도중에, 진류(陳留)의 태수 장막(張邈)이 사자를 보내 여포를 진류로 맞이하게 된다. 


장막(張邈)은 연주 동평국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의협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반동탁 연합군에도 참여했으나, 원소가 맹주로서 교만한 기색을 띄자 정의(正義)로써 이를 질책하였다. 원소는 이 일로 인해 원한을 품고 있었고 그가 여포를 받아주었다는 말을 듣자 조조에게 장막을 공격해달라 요청한다. 조조가 이를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장막은 안심하지는 못하는 형국이었다.


194년 봄,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하며, 무양(武陽)사람 진궁을 동군(東郡)에 주둔시키자, 이에 진궁이 장막을 찾아와 설득했다.

(<삼국지연의>처럼 조조와 진궁이 도주 중 여백사를 찾았다가 조조가 여백사를 죽이고 진궁은 떠났다는 것은 창작이다. 조조가 여백사를 죽인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후에 다루어 보겠다.)


" 이제 천하가 나뉘어 무너지고 웅걸(雄桀)들이 아울러 일어났습니다. 그대는 10만 군사를 끼고 사전지지(四戰之地)에 처해 있으니 (진류(陳留)는 땅이 평평하고 사면(四面)으로 적을 맞이하니 이 때문에 이를 일러 사전지지(四戰之地)라 하였다.) 칼을 움켜쥐고 노려본다면 또한 족히 인걸이 될 만합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남에게 제어당하고 있으니 비루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州)(연주)의 군대가 동쪽을 공격하느라 그 거점이 텅 비었고 여포는 장사라 싸움을 잘해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그를 맞이해 함께 연주를 점거하고 천하형세를 살펴보며 시사(時事)가 변통(變通)하기를 기다린다면 또한 한 시대를 종횡할 수 있습니다. "


진궁은 장막을 부추기고 설득해 여포를 연주목으로 삼아 조조의 복양현을 점거하니 연주의 군현들이 그들에게 호응했다.

하지만 견성, 동아, 범현 등은 순욱과 정욱이 굳건히 방비하고 있어 무너뜨리지 못했다.


서주에서 급히 퇴군한 조조와 여포는 백여일을 서로 대치하였다. 이때 날이 가물었고 누리떼(풀무치, 메뚜기)가 일어 양식의 부족으로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고 조조는 여포를 재빨리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조는 휘하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조.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 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 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


그리고는 진군하여 여포를 공격했다. 조조가 복양을 포위하자 복양의 전씨(田氏)가 조조에게 성문을 열어줄 것을 약속하고 내통하였고,

조조는 전씨의 도움을 받아 복양성 동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조조는 동문에 불을 질러 이 자리에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보였는데, 여포의 기병대가 조조의 정예 청주병을 공격하자 청주병이 무너졌고, 여포의 기병들이 조조를 붙잡았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조조에게 묻는다.


후사르.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조조는 어디에 있는가?" (사진은 폴란드의 후사르)


조조는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조조.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황마(黃馬)를 타고 달아나는 자가 조조입니다."


이에 여포의 기병들이 조조를 놓아주고는 황마를 탄 자를 쫓아갔다. 동문의 불길이 거세었으나 조조는 손에 화상을 입으면서 빠져나온다.


구사일생한 조조는 겨우 견성으로 돌아가 공성무기를 만들도록 했고, 이내 다시 여포를 공격하여 또 백여일 동안 대치했다. 싸움은 가을인 9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해 곡식의 1석이 50만전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진짜로 잡아먹었다. 군량이 부족하자 조조는 새로 모집했던 관원과 군사들을 모두 파해 돌려보냈다. 


195년 봄, 조조는 여포의 영역인 정도현을 습격했다. 쉽게 합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여포가 구원을 나오자 여포에게로 말을 돌려 여포를 격파했다.


여름, 조조는 거야현에 주둔하고 있던 여포의 장수 설란과 이봉을 공격했고 여포는 설란을 구원했으나 조조가 대승하였다.

여포는 다시 진궁과 함께 만여명의 군사를 수습하여 조조와 대적했으나, 조조는 일부러 군사를 적게 보이게 하고 호표기와 보병으로 매복하여 여포의 최후의 한방을 깨뜨린다. 

여포는 밤중에 달아났고 서주의 유비에게로 가게 된다.


한편 여포를 영입했던 장막은 장초를 남겨 가솔들을 거느리고 동구현으로 피신하게 하고 자신은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러 갔지만, 이내 조조가 따라와 포위했고 장초와 그의 삼족들을 멸했다. 장막은 원술에게 가던 중 배신한 자신의 병사들에게 죽었다.


8. 서주의 여포


유비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포를 후대해주었다. 이때 여포는 유비를 동생 취급하자, 유비의 제장들이 분노했고, 유비는 내분을 막기 위해 여포를 하비성 밖에 영지를 주어 주둔하게 하였다. (소패라는 언급은 없는것으로 확인된다.)


이때 원술이 서주의 우이현과 회음현을 공격했다. 이에 유비는 하비에서 출정해 그를 막으러 갔다. 이에 원술은 여포에게 동탁을 죽인 것, 조조와 대적한 것을 공으로 세워 군량 20만 석을 조건으로 유비를 공격할 것을 요청한다. 이에 여포는 응낙하고 하비성으로 진군할 즈음, 하비에서


장광이라는 사자가 여포에게 도착해


"장익덕이 하비의 상(相) 조표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병사 천명이 서쪽 백문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펄쩍 뛰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서문으로 오신다면 즉시 성문을 열겠습니다."  라고 하며 여포를 하비로 끌어들인다.


(<여포전>에서는 장비가 조표를 죽여버린 것으로 서술했고, 반대로 <선주전>에서는 죽였다는 이야기는 없고 불화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진다. 둘 다 주석 <영웅기>의 기록이다. (짜증이 안날 수 없다.) 다만, 조표가 본래 도겸의 수하였었다는 점을 들면, 포용력 하나는 끝내줬다던 유비가 기존의 서주세력과 자신의 세력을 확실히 융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니 절치부심하고 촉에서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원술이 유비를 공격하여 승리했고, 여포가 유비의 처자식을 사로잡자, 유비는 하비로 돌아와 여포에게 반대로 의탁한다.

여포는 유비를 소패에 주둔하게 했고, 서주자사를 자칭했다.


이후 원술이 장수 기령에게 3만의 병력을 주어 유비를 다시 공격하게 했는데, 유비는 이에 여포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여포의 제장들이 말했다.


중국 신하.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장군은 늘 유비를 죽이고자 하셨으니, 이제 가히 원술의 손을 빌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포는 반대했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그렇지 않소, 원술이 만약 유비를 격파하게 되면 북쪽으로 태산(太山, 아마 원소를 말하는 것 같다.)같은 제장들과 연결될 것이니, 나는 원술에게 포위당할 것이오. 구원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여포는 유비와 원술이 서로 생존하여 견제하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불어 원술이 약속한 군량 20만석의 절반만을 보냈기에 여포는 앙심을 품고 있었다.


여포는 곧 보병 1천과 기병 2백을 이끌고 소패로 내달았다.


기령은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을 거두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여포는 시종을 보내 기령을 초청했다.

기령과 여포는 술자리를 가졌다. (연의와는 다르게 유비는 없다. 솔직히 당연한 이치다.)

이에 여포가 기령과 제장들에게 말했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현덕(玄德, 유비)은 내 동생이오. 동생이 제군(諸君)들에게 곤란을 겪으니 이 때문에 구원하러 왔소이다. 내 성정이 어울려 싸우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나 다만 싸움을 화해시키는 것은 좋아하오."


여포는 문지기를 시켜 영문 밖에 극(戟) 하나를 세우게 했다. 그리곤 다시 말했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제군(諸君)들은 내가 극(戟)의 소지(小支, 극의 가지창 부분)를 쏘는 것을 보시오. 적중하면 제군들은 응당 화해한 후 떠나고 적중하지 않으면 남아서 결투(決鬪)하시오."


여포가 활을 들어 극을 쏘았는데 정확하게 소지에 맞았다. 주변의 제장들은 모두 놀라


"장군은 천위(天威, 하늘의 위엄)를 갖추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196년 6월, 여포의 장수 학맹이 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하비를 급습했다. 놀란 여포는 부인을 끌고 과두단의(科頭袒衣, 관을 쓰지 않은 맨머리에 옷을 갖춰 입지 못함) 상태로 똥간에 숨어들어가 벽을 밀어내고 난을 피했다. 그리곤 고순의 군영으로 들어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고순이 말했다.


고순.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장군께서 갑자기 이리 오시니,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여포가 말했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하내(학맹은 하내 출신이다.) 놈들의 말(言)소리였소."

(하내지방 사투리를 말하는 것 같다.)


고순이 말했다.

고순.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이는 학맹이로군요."


고순은 이내 거병하여 하비로 들어가. 학맹을 깨뜨렸다. 학맹은 패주하였는데, 전투는 밤새 계속되었고 날이 밝자 학맹은 자신의 군영으로 되돌아갔다. 이때, 학맹의 장수 조성이 학맹에게 반기를 드니, 학맹은 조성을 찔렀고 조성은 학맹의 한쪽 어깨를 찍었다. 

결국 고순에게 붙잡힌 학맹은 참수되었고, 조성을 수레에 태우고 여포에게 보냈다. 여포가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가?" 라고 묻자 조성은


조성.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학맹은 원술의 모책을 받들었습니다." 라고 말했고, 여포는 함께 모의한 자를 물었다. 그러자 조성은


조성.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진궁이 공모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때 진궁은 여포의 바로 옆에 있었는데 얼굴이 엄청 붉어져 곁에 있던 사람들이 여포와 조성의 대화를 듣지 못했음에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여포는 진궁이 대장(大將)이므로 이를 불문에 부쳤다.

여포는 조성을 잘 치료해주었고, 학맹의 군영을 조성에게 주었다.


원술이 칭제하고 여포와 결탁하여 자신의 아들을 여포의 딸과 결혼시키기 위해 청하니 여포가 이를 허락했다. 

진규는 패(沛)의 상(相)이었는데, 원술과 여포가 혼인으로 맺어지면 서주와 양주가 합종하니 장차 국난으로 이어질 것이라 여겼다. 이에 여포에게로 가서 설득한다.


진규.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조공(曹公, 조조)이 천자를 봉영(奉迎)해 국정을 보좌하고 그 위령(威靈)을 세상에 드날리고 장차 사해를 정벌할 것이니, 장군께서는 의당 그와 함께 힘을 모아 계책을 세워 태산 같은 안녕을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혼인을 맺으면 천하에 불의(不義)의 이름을 덮어쓰게 되니 필시 누란지위(累卵之危, 큰 위험)가 있을 것입니다."


여포는 원술이 애초에 자신을 받아들이지조차 않았고, 군량 약속도 어겼으며, 학맹을 시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딸이 이미 길을 떠났지만 이를 뒤쫓아 되돌아오게 하고, 중매로 왔던 원술의 사자 한윤을 묶어 조조에게 보냈다.

한윤은 허도에서 참수되어 저자거리에 목이 내걸렸다.


9. 여포의 고립


진규는 아들 진등을 조조에게 사자로 보내려고 했지만, 여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황제의 칙령으로 여포가 좌장군에 오르자 여포는 크게 기뻐하며 진등을 조조에게 답례사로 보낸다.


진등은 조조에게 찾아가, 여포는 용맹하나 꾀가 없으니 빠른 시일 내에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조는 진등에게 서주의 내응을 부탁한 뒤, 진등을 광릉태수로 임명해 준다.


여포는 그런줄도 모르고 조조에게 기쁜 마음으로 서신을 쓴다.


" 내가 남에게 죄를 지었으니 몸이 나뉘고 머리가 잘려야 하나 손수 노고를 위로받고 후하게 포장(褒獎, 칭찬하고 장려함)받았소. 거듭 원술 등을 구포(購捕, 토벌)하는 조서를 받았으니 나는 응당 목숨을 다해 힘쓰겠소. "


조조는 한술 더 떠 여포를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임명해준다. 하지만 여포가 원하는 직위는 서주목이었다. 때문에 돌아온 진등을 여포가 꾸짖는다.


여포.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경의 부친이 내게 조공(曹公, 조조)과 협력하길 권하여 공로(公路, 원술)와의 혼사도 끊었소. 내가 구하던 것은 지금 하나라도 얻은 것이 없는데, 경의 부자는 나란히 현중(顯重, 지위가 오르고 권세가 중해짐)되었으니 경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오! 경이 나를 위해 말했다면, 그 말이 무엇이었소?"


그러자 진등은 특유의 언변으로 유유히 빠져나간다.


진등.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제가 조공을 만나 이르길, ‘장군을 대우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아 응당 고기를 배불리 먹여야 하니, 배부르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공이 이르길, ‘경의 말과 같지 않소. 비유하자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배가 고프면 부릴 수 있으나 배가 부르면 날아가 버릴 것이오.’라 했으니, 그 말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에 여포는 노기를 풀었다.


한편 , 원술은 혼사를 깨고 사자를 조조에게 보내 죽게 한 여포에게 분노하여 조조에게 패한 후 떠돌던 양봉과 자신의 대장 장훈을 연합해 여포를 공격하려 했다.

여포는 진규의 계책을 따라 양봉을 회유해 장훈을 공격하여 승리하면 빼앗은 군자금은 모두 주겠다고 했다. 양봉은 한섬과 함께 그 말을 듣고 장훈을 대파해 버린다. 이후 진규에 대한 여포의 신임은 점점 높아진다.


198년, 유비가 소패에서 그 세력이 강대해지고 군대가 1만을 넘어서자, 여포는 위기를 느껴 다시 원술과 연합하고 고순을 보내 소패에서 유비를 격파한다.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했지만 하후돈 역시 고순에게 패한다. (여기서 하후돈은 한쪽 눈을 잃는다. 다만 먹지는 않는다.)


이에 참다못한 조조가 직접 여포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고, 여포에게 사신을 보내 화복(禍福)에 관해 논했다. 여포가 항복하려 하자 진궁이 제지했다.


진궁.jpg 말 중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엔 여포가 있다. 여포 (스압주의)

"의당 역격(逆擊, 역공)하여 이일격로(以逸擊勞, 편안히 쉰 군으로 지쳐있는 군을 들이침)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여포는 군대를 이끌고 성에서 나와 조조와 맞섰으나 연전연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서주 일대 군현은 진규 부자에 의해 조조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조조는 여포의 용장 성렴을 격파해 참했다.


여포가 다시 항복하려 하자 진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