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1-15 02:23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글쓴이 : 진주꽃
조회 : 25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나는 그모스야트의 아들, 모압의 왕 디본 사람 메사이다.


나의 아버지는 왕으로 30년간 통치하였고 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내가 왕이 되었다.


그모스께서 나를 모든 왕들로부터 해방시키어, 도리어 그들을 업신여길 수 있게 하였기에 나는 그모스를 위한 신전을 카르호에 세웠다.


그모스께서 나를 모든 왕들로부터 구원하사 나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 위에 나의 기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모스께서 모압에 진노를 품어 이 땅은 수많은 날 동안 이스라엘 왕 오므리로부터 고난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후 그도 "내가 모압을 핍박하리라" 라고 한 말을 나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와 그의 집 위에 나의 기쁨을 보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파멸하였다. 영원히 파멸하였다.


오므리는 메드바의 모든 땅을 소유로 하고, 거기서 평생 40년을 살았고 그의 아들이 반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모스는 마침내 그날에 그것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리고 나는 바알므온을 건축하고 그 안에 저수지를 만들고 가리야델을 세웠다.


옛 이스라엘 왕이 아다롯을 건설한 이래 갓사람들이 그곳에 살았으나 내가 그 도시를 정복하였고, 모압의 신 그모스를 위하여 그 도시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었다.


나는 아다롯에서 화로를 가져와 그모스에게 바쳤으며 나는 거기에 샤론 사람들과 마카롯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그모스께서 "가서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느보를 취하라 함에"


밤에 들어가 새벽부터 한낮에 이르기까지 싸워 마침내 함락시키어 성안의 모든 백성, 남자와 여자를 모두하여 7000명을 죽였으니 이는 아쉬타르 그모스에게 바치기 위함이다.


나는 야훼를 위한 제기들을 취하여 그모스 앞에 바쳤다.


이스라엘 왕은 야하스를 건설하였고 거기에 머물면서 나와 대적하였으나, 그모스가 그를 나의 앞에서 멀리 쫒아내버리시니, 나는 모압 용사(모압의 부족장들로 추정) 200명을 데리고 나가 야하스를 취하여 드본에 속하게 하였다.


나는 그루호를 세우고 나무성채를 쌓았다. 


그리고 나는 문을 만들고 탑을 세웠으며 왕궁과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루호에는 저수지가 없었기에 나는 그루호의 백성들에게 각자 저수지를 만들도록 하였다.


나는 이스라엘 포로들을 시켜 저수지를 건설하게 하였다.


나는 아로엘을 건설하고 아르논에 큰 길을 닦았다.


나는 벧-마모트를 다시 세웠다. 왜냐하면 그것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베째르를 다시 세웠다. 왜냐하면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디본 사람이 나의 수하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50명씩 편제되고 배치되었다.


나는 내가 그 땅에 포함시킨 수백여 개의 성읍을 다스렸다.


나는 벧-메드바와 벧-디블라타인, 벧 바알므온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그 땅의 소규모 가축 때를 옮겼다. 그리고 호로나임으로 가 그곳에 살았다.


그모스가 나에게 말했다. "가서 호로나임을 정복하라"  나는 내려갔고.... 그모스는 그 도시를 회복시켜 주셨다. 


거기서부터... 그리고....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위 내용은 1868년 트란스 요르단 디반 근교에서 발굴된,


모압왕 메사의 석비에 새겨진 내용들로서,


* 메사 석비는 그 발굴을 위한 현지인들과의 흥정과정에서 현지들에 의해 비석이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다행히 복원작업에 성공하여 중요한 내용은 다 보존되었으며, 고대 히브리어와 매우 유사한 모압어의 해석이 완료되어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구약성서의 열왕기하를 주의 깊게 읽었던 적이 있는 펨창이라면,


위 석비의 내용이 열왕기하 3장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성서에서 묘사하는 이 모압왕 메사와 이스라엘의 전쟁의 '요약'은 아래와 같은데,


모압왕 메사는 양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이스라엘 왕에게 암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쳤다. 그러다가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다.(4~5절)


모압왕 메사의 배반에 대해 이스라엘 왕 요람은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왕과 함께 출정한다.(9절)


그러나 물이 없어 엘리사의 도움으로 물을 얻었고, 이스라엘 연합군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하고 쳐들어온 모압군을 격퇴하였다.(24절)


궁지에 몰린 모압 왕 메사는 정예 용사 칠백을 데리고 에돔왕 쪽으로 돌파하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자 자기의 장자를 성벽 위에서 번제로 드렸고 이것을 본 이스라엘인들은 그곳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27절)


* 메사 석비의 내용 구조는 구약성서의 서술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한데, 외세의 침입에 의한 역사적 고난을 신의 진노로 해석하는 것과 그에 대한 회복, 그리고 침략자의 영원한 멸망, 신의 취하라 하여 그 성읍을 취해 자신들의 영토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은 전형적인 '구약성서적' 서술로서, 이러한 서술 방식은 모압과 이스라엘의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 문화적으로도 매우 밀접한 국가였음을 보여주지


* 또한 메사 석비의 내용 중 샤론과 마카롯 사람은 모압인들 또한 이스라엘 12지파처럼 내부적으로 '지파'들이 존재하던 연맹왕국임을 보여줘


* 물론 포로를 진멸하는 행위 또한 모압인들만의 '특기'가 아니어서 히브리 왕들에게서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고대 오리엔트 민족들의 삶의 방식이었지


* 메사 석비를 통하여 우리는 히브리인들과 모압인들의 차이 또한 발견할 수 있는데, 히브리의 유일신 신앙과 달리 여성성을 가진 또 하나의 그모스(아쉬타르-그모스)의 존재와 철저히 신의 입장에서 쓰여지고 왕들이 조연으로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 서술 방식에 비하여 메사 석비는 왕의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형태로 쓰여진 점에서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 당시 오리엔트 세계의 일반적인 정서에 비춰 히브리인들이 '독특'하였고, 모압인들의 생각이 보다 '보편적'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거야


* 메사 석비는 성서 이외의 자료들 중 '야훼'가 언급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인 유물이기도 해


* 그모스는 모압의 주신으로서,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던 셈족의 만신전에서도 그모스를 찾을 수 있어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이 오므리 왕조 시기 있었던,


모압인들과 히브리인들의 전투에 대한 양 측의 기록을 종합하면,

*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카데시 전투'에 대한 양측의 기록처럼 각자에게 어느정도의 유리한 편집은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제 6대 국왕이었던 오므리 이래로,


이스라엘 왕국은 모압을 그들의 '봉신'으로 만들었고,


모압은 '이스라엘의 멍에'를 지며 무거운 조공을 바쳐야 했으나,


강력한 군주였던 오므리(성서에서는 그의 집권기가 12년으로 기록되어있지만, 메사 석비에서는 40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40년은 강력했던 군주의 한시대를 상징하는 숫자로 성서의 사관입장에서 오므리는 종교적으로 악한 군주였기 때문에, 그의 통치기를 실제역사대로 서술- 다윗과 솔로몬은 성서의 저자가 인정하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강력한 군주로서 그들의 제위기는 모두 40년에 맞춰짐-한 반면 모압 입장에서는 오므리- 오므리의 사후 100년 뒤 아시리아인들의 문서에서까지 이스라엘은 '오므리의 집'으로 칭해져- 는 강력한 정복군주였기에 그의 치세를 40년으로 이라는 상징적 표현을 써서 기록한 것이지)와


아합의 사후(메사 석비에는 오므리의 아들과 전쟁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아들'은 자손이라는 의미로 실제 그와 전쟁을 한 인물로 성서와 교차검증 하면 이스라엘의 9대왕이자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요람'이야- 성서에는 아합-역시 강력한 군주로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끌던-이 죽고 아하시야가 즉위한 이후 모압의 조공을 중단한 것으로 나오며-아하시야의 제위기는 2년으로 그는 창가에서 떨어지는 부상으로 제위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러한 모압의 '자립'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으나, 아하시야의 왕위를 계승한 요람은 자신의 영향권 아래 있는 유다와 에돔의 왕과 연합하여 마침내 모압에 대한 응징에 나서게 된 것이지)


모압의 이탈하였고,


다시 모압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려는 이스라엘 왕국 및 그 동맹세력과 모압 간의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교차검증 되는 사안이며,


최종적으로 양측의 기록을 종합하여 볼때,


이스라엘의 모압의 도성을 포위하는 등 우세한 군사력으로 모압을 밀어붙혔던 것은 맞으나,


결국 전쟁의 '전략적 목표'- 모압을 다시 이스라엘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며 조공을 바치게 하는-를 달성하는데는 실패하였으며,


식수공급 문제 등(성서에는 엘리사가 해결해줬다고 하지만...) 으로 인한 문제를 안고 있던 원정군은 장기전을 버티내기 힘들어,


결국 철군하였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메사는 결국 '이스라엘의 멍에'를 떨쳐내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거야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오므리가 모압을 점령하였고,


그 손자 요람이 끝끝내 모압의 '자립'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은,


이유가 있었는데,


이 모압은 일전에 소개했던 에돔인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대로(King Highway)에 위치하였던 종족으로서,


페니키아와 혼인동맹을 맺을 정도로 '무역'을 통하여 '국부'를 증진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오므리는, 


모압을 점령함으로서, 


레반트 지역의 '무역'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또 다른 수입원으로서 모압으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받았는데,


이후 오므리 왕조가 흔들리는 틈을 타 모압이 자립하였고,


이러한 모압의 상실은,


종교적으로 히브리 선지자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지만, 군사적 전공과 국부의 증진을 통하여,


종교적 비난을 누르고 권력을 유지하던,


오므리 왕조에게 결정적 타격이 되었고,


결국 이 원정의 이스라엘쪽 지휘관 이었던 요람은,


후에 그의 부하 예후의 쿠데타로 살해되어,


오므리 왕조는 몰락하고,


더불어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 또한 끝나고 말았어


* 즉 모압의 이탈은 오므리 왕조 몰락의 시작이었던 셈이며,


메사 석비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이 영영 멸망하였다는 구절은,


오므리 왕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 이스라엘의 국력은 반란자 예후의 증손자 여로보암 2세때에 이르러서야 회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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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


메사 석비와 관련한 히브리인들의 역사에 관한 소개는 이쯤 하고,


이번 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 '모압'에 대해 보다 포커스를 맞춰 소개하려고하는데,


상술하였듯이 모압은 히브리인들과 거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민족으로서,


히브리인들은 그러한 동질감을,


모압인들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으로 칭함으로 표현하였어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하게 풀면,


저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가 신의 진노로 인하여 멸망할 때,


롯과 그의 가족만이 구원을 받았으나(하지만 롯의 아내는 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고 서술됨),


롯은 그 때의 충격으로 딸들을 데리고 동굴에서 살았는데,


이에 이대로 가다가는 결혼도 못 하고, 자식도 낳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그의 두 딸이,


아버지에게 포도주를 먹이고,


'야스'를 하였는데 ㄷㄷㄷ


* 정확히는 언니가 먼저 주동한 일로, 언니가 먼저 '야스'를 하고 나왔지만 아버지는 밤새 무슨일이 있었는지 몰랐으며, 곧 이어 동생도 언니의 주선에 따라 '거사'를 치름


이렇게 해서 두 자매는 각각 아들을 하나씩 낳았고,


그들의 이름은 '모압'과 '암몬'으로서,


각각 모압족과 암몬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


* 인종적으로 사실상 같고, 거의 같은 문화를 가진 모압인들을 히브리인들은 이렇게 자신의 '친척'으로서 표현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들과 치고받고 살던 모압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비하적' 시각이 담긴 설화를 채택하여 성서에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또 워낙 수많은 막장신화들이 존재하던 시대인만큼... 모압인 자신들도 흡사한 구조의 이야기를 '건국신화'로서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거야... 어쨌든 역사적으로 모압과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동안 치고박고 싸우면서도 상호 간에 유사한 문화의 공유에서 오는 '동질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선에서...


* 히브리인들은 형제민족으로 간주한 에돔인의 경우는 그 삼대 후 자손은 야훼의 총회에 들 수 있도록 하였지만, 모압인의 경우는 십대 자손까지 야훼의 총회에 입회가 금지되었는데(사실상 모압인의 야훼의 총회 참여를 영구히 봉쇄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구약성서는 모압인들과의 혼인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을 표현하지만, 그러한 모압과의 통혼 및 교류에 대한 성서 저자의 비난이 있는 것 자체가 모압인과 히브리인간의 빈번하고 밀접한 교류들을 반증하며, 다윗의 증조모(룻) 또한 '모압 여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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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이외의 자료에서 모압은,


저 유명한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정복지 중 하나로서 언급되며,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높이 12.5 cm 너비 14 센티미터 cm 크기의 현무암 비문 조각인 


'케락 비문'이 또한 있는데,


이 비문은 모압왕 '그모스야트'의 비문으로서,


'그모스야트'는 메사 석비를 세운 메사왕의 아버지였어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이외에 모압에 대한 역사적 흔적으로는,


아시리아인들의 기록이 있는데,


아시리아인들은 모압을 감히 자신들에게 불온한 모습을 보인 이민족들 중 하나(유다, 에돔과 함께)로 언급하며,


이후에는 조공셔틀 중 하나로서 기록됨(이를 통해 우리는 모압 역시 레반트 지역의 반아시리아 분위기에 탑승하여 '아시리아의 멍에'를 벗으려는 시도를 한 때 하였던 적이 있으나, 결국 유다와 마찬가지로 팍스 아시리아나 시대를 수용한 것을 알 수 있지- 안 숙였으면 바로 멸망이니...)


* 모압왕들의 아시리아에 대한 조공 기록은 아래와 같은데,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에게 조공한 왕으로 '살라마누'가 있으며,


센나케리브는 모압왕 '캄무수나드비'로 부터 조공을 받았고,


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이 모압의 왕들 -무수리와 카마샬투-을 자신의 '신하'로 칭한 것이 기록됨


image.png 고대 오리엔트 왕의 석비와 관련한 이야기들

오늘 소개하는 성서 이외의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압에 대한 흔적은 여기까지로,

 

'모압'과 관련한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