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1-11 10:58
[중세유럽] 때껄룩은 이단이야! 外
 글쓴이 : 진주꽃
조회 : 12  
1. 때껄룩은 이단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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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라니옹~ 내가 이단이라니옹~"

1235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검은 고양이를 사육한 죄로 카타리파를 숙청했다.
사실 카타리파는 1209년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알비 십자군에 의해 토벌된 적이 있었다.
아르메니아 바오로파와 보고밀파의 영향을 받은 카타리파는
마니교의 영향을 꽤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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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양이는 중세 수녀원에서도 사육이 허락될 정도로 친숙한 동물이었다.
쥐를 잡는다는 핑계로 키우면서 애완용으로 키우며 수도 생활의 스트레스를 달랬던 것.

그러나 검은 고양이만은 예외였는데,
이는 이집트 바스테트 여신이 반인반수의 검은 고양이였던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집트 신화는 기독교 입장에서는 철지난 이단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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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풍요의 여신 바스테트.
이집트 사람들은 번식력이 강한 고양이가 쥐를 잡아주어 신성하게 여겼다.
지금도 그 영향이 남아서 고양이에게 몹시 호의적이다. 

1323년에는 한 시민이 고양이 소리가 들려 땅을 파보니,
상자에 담겨 산채로 묻힌 고양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행위를 이단의 주술적인 행위로 간주했고 곧바로 성직자들은 수사에 나섰다.
그 결과 시토회의 수도원장과 3명의 수사들을 범인임이 밝혀졌다.
이들은 악마와 거래했음을 자백(???)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 화형에 처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느 영지에 열병이 퍼지자 영주가 대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난 검은 고양이가 영주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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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르 내놔라옹~"

검은 고양이의 압박(?)에 영주는 성호를 그었고,
이 악마의 하수인(...)은 밥 안주는 영주에게 불경스런 소리하악!를 내뱉고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로 열병은 사라졌고, 영지 주민들은 신을 칭송하며, 신앙심이 두터운 영주를 존경했다.
이후 이지방에서는 해마다 성요한 축제 전야에,
열병을 쫓기 위해 13마리의 고양이를 잡아 화형시키는 의식을 치뤘다고 한다.
몰론 지금은 진짜 대신에 고양이 인형을 쓴다고.

사실 중세 초기만 해도 고양이는 친숙한 동물이 아니었다.
원래 유럽에서 쥐잡기 동물은 족제비나 담비였고,
고양이는 이집트나 중동에서 무역선을 타고 종종 밀입국(...)하는 동물이었다.
본격적으로 유럽에 고양이가 수입된 것은 십자군 전쟁 이후로, 
십자군에 참여한 기사들이 고양이의 쥐잡이 실력을 높이 평가해서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 바스테트 여신을 상징하거나, 이슬람교도들이 고양이를 좋아한 탓에
꽤 오랫동안 악마의 하수인 취급을 받았다.



2. 체포당한 풍댕이 애벌레

중세 스위스 쿠어(Chur) 주에는 흉작으로 농민들이 고통받고 있었다.
이에 이 지역 판사는 풍뎅이 애벌레를 체포해 법정에 출두시켰다. 
죄목은 작물의 뿌리를 갉아 먹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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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생계형 범죄니까 우리 애 좀 봐주십셔."

판사는 법정에 출두한 풍댕이 애벌레에게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만물은 창조주이신 신을 따르는 게 마땅하다,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생물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을 해롭게 해서는 안된다. 
고로 피고는 유죄로, 그 죄는 용서될 수 없다."

다만 무지한(...) 풍댕이 애벌레의 벌레의 사정을 감안하여,
처형하는 대신 황무지의 숲 속 그늘진 곳으로 유배하고, 
다시는 경작지로 나와 죄를 짓지 말도록 경고하였다고 한다.



3. 개 대신 돼지, 돼지 대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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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편견과 달리 매우 청결하고 똑똑한 녀석이다.
중세의 돼지는 아직 개량되지 않아 짤방에서 처럼 야생 멧돼지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중세에는 영주들이 농노들의 사냥을 엄격히 금지했다.
영지 내 산짐승의 개체를 보존할 필요도 있고, 사냥은 군사 훈련의 일환이기도 했기 때문.
그런데 농노가 불법으로 사냥을 한다? 그건 반역행위였다.

다만 마냥 억눌러서도 안 되기 때문에, 
들판에서 덫을 놓아 토끼나 참새, 메추라기 같은 걸 잡는 정도는 눈감아 줬다.
그런 것들은 농사를 망치는 유해조수고, 숫자도 많아서
높으신 분들이 일일이 잡으러 다닐 수 없었다.

이렇게 봐줬지만, 개를 사냥에 데려가는 걸 엄격히 금지했다.
개를 훈련시키면, 사냥이 성공할 확율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게 인간이라,
농민들은 쥐잡이 용으로 키우는 족제비를 훈련시켜 토끼 몰이 사냥에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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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뉴포레스트 주의 한 농노는 돼지를 잘 길들여서 사냥개 대용으로 썼다. 
영특한 돼지는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이 농노는 돼지 훈련 비결을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 돼지가 하는 일을 개가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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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송로버섯 채취다.

유럽에서 고급 식재료로 통하는 송로버섯의 채취는 원래 탐색용으로 돼지를 썼다.
후각이 몹시 뛰어난 돼지는 땅속에 묻혀 있는 송로버섯을 찾는데 도사였기 때문.
하지만 돼지가 버섯을 먹어치우는 경우가 잦았기에, 
비슷하게 후각이 뛰어나지만, 버섯에는 욕심이 없는 개를 사용하게 되었다.



4. 어머니는 사자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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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절부터 인류는 사자 숭배 신앙이 있었다.

빙하기에는 동굴 사자가 유럽 곳곳에 살고 있었고,
인간은 이 사나운 짐승과 싸워서 역세권(...) 부동산(...)을 쟁취해야 했다.
사자가 사는 곳 주변에는 사냥감도 많고, 또 동굴은 안락하니까.

한편으로 인류는 사자와 싸우면서 사자를 강자로 숭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 구석기 유물 중에는 반인반수의 사자상이 발견되곤 한다.

고대에 들어서도 사자는 강자의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갔다.
헤라클레스 같은 신화의 영웅들도 토벌 상대로 여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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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도 사자는 강함의 간지로 호랑이와 쌍벽을 이룬다.

중세 십자군들이 중동원정을 갔을때, 무슬림들이 사육하던 사자, 표범과 맞닥들인 적이 있었다.
이때 표범은 무장한 십자군을 보고 달아났으나,
사자는 무섭게 울부짖으며 거침없이 싸웠다고 한다.
당연히 중세 유럽인들은 "역시 사자!" 라고 감탄했으리라.
왕과 귀족들은 이런 사자를 생포해서 유럽으로 가져가 자랑으로 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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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 시에서도 기증받은 사자를 키우고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24마리의 사자를 키웠고, 마리당 하루에 6kg의 양고기를 줬다고 한다.
이 사자 우리를 관리하는 사람은 3명이었는데,
한번은 우리의 자물쇠를 채우는 걸 잊어 사자들이 시내로 뛰어나왔다고 한다.
그 바람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한 소년이 사자에게 물렸다.
그러자 이 소년의 어머니는 사자를 두들겨 패서(!!!) 아들을 구했다.
어머니가 사자보다 강했던 것이다 ㄷㄷㄷ



5. 곰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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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시대 북극곰은 유럽지역까지 내려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점차 사라졌다고.....

중세 때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숲과 황무지가 개간되었다.
이 와중에 수많은 야생짐승들이 인간에게 토벌당했는데,
곰도 그렇게 사냥당한 대표적인 동물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유독 곰이 많았는지, 곰을 많이 잡고 세운 도시를 후에 '베른'이라고 불렀다.
독일의 베를린도 상징이 곰인데,
도시를 세울 적에 사냥꾼이 곰을 발견하고 사냥하려다가
새끼곰을 거느린 어미곰이라는 걸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곰을 발견한 곳을 베를라인(Baerlein)이라 불렀는데, 이게 나중에 베를린이 되었다고.

1251년, 영국 국왕 헨리 3세는 선물로 진귀한 흰 곰 한 마리를 받았다.
그는 런던 시에 흰 곰을 맡겨 사육하도록 지시했는데,
시청에서는 곰 사육비와 사육사 급료를 무척이나 짜게 지급했다.
이렇다 보니 사육사는 템즈강에서 낚시를 해서 곰을 먹여살렸는데, 
길들여진 곰은 종종 사육사를 따라 강가로 왔고, 이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부르타뉴 공국에서는 사제 한 사람이 곰을 길들였다.
곰은 그의 여행에도 따라다녔는데, 
한 번은 사제를 따라서 시내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시민들이 혼비백산했다고.